악어는 빨리 가라앉지만...

"1965년의 끔찍한 마지막 나날들 이래, 인도네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모두, 특히 이 나라의 성격을 꿰뚫어보고자 했던 이들이라면, 거대한 내적 트라우마가 그들의 주체를 흔들었다는 것은 알되, 그 효과가 무엇인지는 희미하게 알지 못하는 불편한 위치에 있다......당연히 그와 같은 엄청난 재난이라면, 특히 대개는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일일진대, 나라를 움직이지 않았을 리가 없으나, 얼마나 멀리, 얼마나 영구히 움직였는가를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인도네시아에서 감정들은 극도로 서서히, 그리고 어쩌면 극도로 강렬하게, 떠오른다. 그들은 말한다. "악어는 빨리 가라앉지만, 천천히 올라온다." 지금 현재 인도네시아 정치에 대한 저술은, 그리고 정치 그 자체는 악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데에서 비롯된 비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클리퍼드 기어츠 1972 (삐삣 로치앗, "나는 공산당인가, 안 공산당인가?", 서지원 번역, [아시아저널] 4호, 2011년, 19~57쪽 중 베네딕트 앤더슨이 붙인 후기에 인용)

1985년 발표된 삐삣 로치앗의 글은 사건 이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1965년 학살에 대한 침묵을 깬 글이다. (이 글을 영어로 번역해 외부에 알린 것은 베네딕트 앤더슨.) 다행히도 이 글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고, 여기에서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 여전히 1965년 학살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영문 번역판은 이 링크에서 볼 수 있다. 

덧글.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자바에서 현지조사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기어츠와 벤 앤더슨 두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연구대상에 대해 신중하고 사려깊게 글을 쓰는가 감탄하게 된다. 이들이 냉전 시기 미국정부와 재기업 재단의 후원을 등에 엎고 발전한 지역학-동남아시아학의 적자임은 분명하나 이들만큼 인도네시아 인민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던 학자도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 


<액트 오브 킬링>에 반대한다! fiction of power

얼마 전 거의 마지막으로 <액트 오브 킬링>을 극장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좋은 핑계가 생기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영화와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친구에게 그가 '본 것'에 대해 전해 들으며, 나는 앞으로도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인 몸짓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텍스트 비판을 하려면 일단 먼저 텍스트를 봐야한다는 말은 늘 맞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가 실재의 자리를 꿰어 차 버린다는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본 관객들은 모두 이 영화(의 스펙터클)에 완전히 압도된 듯해 보인다. 가해자들의 분열과 행위성, 그 잔혹하고 끔찍한 순간을 목도하며 숨조차 멎어버린다. 그렇게 이 영화에서 재현된 인도네시아는 끔찍하고 뒤틀린 인간들이 사는 기괴한 공간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 어디에서도 이 뒤틀림이 시작된 거대한 힘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100만 명이 죽었다는 1965년 학살의 근원은 "공산권 밖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수카르노의 좌편향을 용납할 수 없었던 미국과 제1세계의 신경증이다.(이 실질적인 사건의 배후는 물론 훨씬 복잡하다. 하지만 학살을 딛고 권좌에 오른 수하르토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명확하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는 이 점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제국주의와 구사회세력의 에이전트 혹은 배우에 불과한 학살자들을 화면 위로 불러내 그들이 자신의 괴물성을 '액팅'하게 할 따름이며, 이 지점이 바로 이 영화가 이뤄낸 영화적 성취의 핵심이 된다.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은 제국주의 하의 콩고에서 저질러진 비극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텍스트다. 콘래드는 자신의 소설이 "실제 있었던 일을 아주 조금만 바꾸어놓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구 비평가들은 <암흑의 핵심>을 걸작의 반열에 올리는 동시에 작품에서 끊임없이 (역사적) 콩고를 제거하고 그 서사가 지구상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우화인 것처럼 탈맥락화해왔다. (치누아 아체베를 비롯한 아프리카 비평가들의 비판. 마침내 그 무대를 베트남으로 옮겨 영화화된 <지옥의 묵시록>에서 콩고는 완전히 지워진다. 거기에 <지옥의 묵시록>이 선사하는 양가적인 영화적 쾌락은 <액트 오브 킬링>과 묘하게 닮은 데가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액트 오브 킬링>과 1965년 학살, <암흑의 핵심>과 콩고의 비극이 텍스트와 실재-역사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참으로 유사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1965년 학살과 식민지 콩고는 사라지고 그것을 재현한 영화와 소설만이 남는다. 작품은 '걸작'으로 기억되지만 그 시작점인 사건 자체는 지워진다. 즉 이 영화는 우리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태국 현대사의 비극을 찾아보게 되는 것(<엉클 분미>에 관해 정성일 선생이 했던 말로 기억함)과 정확히 반대의 효과를 낳는다. 분미 아저씨 또한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집행자였다는 점을 잊지 말자.

서구가 이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한국인들이 더군다나 영화인들이 그저 이 영화에 압도당한 채 걸작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광경이야말로 기괴할 따름이다. 우리 또한 인도네시아의 1965년 학살에 버금가는 살상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대체 누구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인가? <액트 오브 킬링>은 기껏해야 참으로 잘 만든 스너프 영화일 뿐이다.

*추가1: <액트 오브 킬링>에 관한 (배급사의 홍보자료를 포함한) 거의 모든 한국어 정보는 역사적 사실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 1965년 학살은 수하르토 정권 하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카르노와 수하르토의 정권 교체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학살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수카르노는 계속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폭력이 완전히 마무리된 1967년에야 수하르토 정권의 '신질서'는 시작되었다. 또한 이 학살은 홍보자료들이 말하는 대로 "비밀"리에 벌어진 일도 아니다. 사소할 수도 있는 이 잘못된 정보들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관객을 사건 그 자체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추가2: 또한 가해자에게 자신의 행위를 재연하고 또 재현할 (그럼으로서 그 순간의 쾌감을 다시 느끼고 또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있다. 예를 들어 피해자의 증언을 듣기 어렵다는 이유로, 나찌 전범에게 유태인 학살을 재연할 기회를 주거나, 전 일본군이 위안부 강간을 재연해 보이는 영화를 만든다면 윤리적 비난을 피할 수 있을까?

*추가3: <까이에 뒤 시네마>는 이 영화에 별 하나를 주고 "그 논리를 해체해야할 스펙타클하고 교활한 장치"라고 혹평했다. <리베라시옹>과 <크리티캣> 역시 "비열한 영화"라고 비판했다. 프랑스에서도 물론 극찬하는 이들이 있지만 적어도 평단에서는 찬반 논란이라도 있는 모양.

(영문 보기)

동남아시아 연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베스트 14 warehouse

자료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리스트.  2008년 동남아 연구 학술지인 SOUJOURN이 40주년을 맞이해 학자들에게 설문을 돌려 만든 리스트라고 한다. 10권을 꼽으려던 것이 이래저래 14권이 되고만 모양.


기어츠의 책이 두 권이나 선정되었는데 <자바의 종교>, <느라가-극장국가> 같은 책들은 민족지로도 재미있는 책이니 번역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영어로 쓰인 책이 대부분인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동남아시아 출신 학자가 쓴 책은 오직 일레토 선생의 Pasyon and Revolution 밖에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 


*알라딘 서재에도 비슷한 글을 올려두었습니다. http://blog.aladin.co.kr/pin/7176059

The Most Influential Books of Southeast Asia

  1. Furnivall, J.S. Colonial Policy and Practice: A Comparative Study of Burma and Netherlands Indi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48.
  2. Reid, Anthony. Southeast Asia in the Age of Commerce, 1450-1680. 1 Volum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8-1993. 이 책은 심산출판사에서 2015년 중 [동남아시아의 대항해시대]라는 제목으로 나올 예정
  3. Scott, James C. 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 Rebellion and Subsistence in Southeast Asi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6. [농민의 도덕경제](제임스 스콧, 김춘동 옮긴, 아카넷, 2004)
  4. Anderson, Benedict R.O'G.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 New York: Verso, 1991 (1983). [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 윤형숙 역, 나남, 2002)
  5. Geertz, ClifFord. Agricultural Involution: The Process of Ecological Change in Indonesia. Berkeley and Los Angeles,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3.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클리퍼드 기어츠/김형준 역, 일조각, 2012)
  6. Ileto, Reynaldo Clemeña. Pasyon and Revolution: Popular Movements in the Philippines, 1840—1910. Quezon City: Ateneo de Manila University Press, 1979.
  7. Leach, Edmund Ronald. 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A Study of Kachin Social Structure. London: G. Bell & Sons, Ltd., 1954.
  8. Scott, James C. Weapons of the Weak: Everyday Eorms of Peasant Resista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5.
  9. Geertz, Clifford. The Religion of Java. Glencoe, 111.: Free Press, I960.
  10. Kahin, George McTurnan. Nationalism and Revolution in Indonesia. Ithaca, N.Y.:Cornell University Press, 1952.
  11. Roff, William R. The Origins of Malay Nationalism.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7.
  12. Leur, J.C. van. Indonesian Trade and Society: Essays in Asian Social and Economic History. The Hague: W. Van Hoeve, 1955.
  13. Wertheim, W.F. Indonesian Society in Transition: A Study of Social Change. Bandung: Sumur Bandung, 1956.
  14. Wertheim, W.F. East-West Parallels: Sociological Approaches to Modem Asia. The Hague: W. Van Hoeve,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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