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거의 마지막으로 <액트 오브 킬링>을 극장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좋은 핑계가 생기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영화와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친구에게 그가 '본 것'에 대해 전해 들으며, 나는 앞으로도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인 몸짓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텍스트 비판을 하려면 일단 먼저 텍스트를 봐야한다는 말은 늘 맞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가 실재의 자리를 꿰어 차 버린다는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본 관객들은 모두 이 영화(의 스펙터클)에 완전히 압도된 듯해 보인다. 가해자들의 분열과 행위성, 그 잔혹하고 끔찍한 순간을 목도하며 숨조차 멎어버린다. 그렇게 이 영화에서 재현된 인도네시아는 끔찍하고 뒤틀린 인간들이 사는 기괴한 공간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 어디에서도 이 뒤틀림이 시작된 거대한 힘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100만 명이 죽었다는 1965년 학살의 근원은 "공산권 밖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수카르노의 좌편향을 용납할 수 없었던 미국과 제1세계의 신경증이다.(이 실질적인 사건의 배후는 물론 훨씬 복잡하다. 하지만 학살을 딛고 권좌에 오른 수하르토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명확하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는 이 점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제국주의와 구사회세력의 에이전트 혹은 배우에 불과한 학살자들을 화면 위로 불러내 그들이 자신의 괴물성을 '액팅'하게 할 따름이며, 이 지점이 바로 이 영화가 이뤄낸 영화적 성취의 핵심이 된다.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은 제국주의 하의 콩고에서 저질러진 비극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텍스트다. 콘래드는 자신의 소설이 "실제 있었던 일을 아주 조금만 바꾸어놓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구 비평가들은 <암흑의 핵심>을 걸작의 반열에 올리는 동시에 작품에서 끊임없이 (역사적) 콩고를 제거하고 그 서사가 지구상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우화인 것처럼 탈맥락화해왔다. (치누아 아체베를 비롯한 아프리카 비평가들의 비판. 마침내 그 무대를 베트남으로 옮겨 영화화된 <지옥의 묵시록>에서 콩고는 완전히 지워진다. 거기에 <지옥의 묵시록>이 선사하는 양가적인 영화적 쾌락은 <액트 오브 킬링>과 묘하게 닮은 데가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액트 오브 킬링>과 1965년 학살, <암흑의 핵심>과 콩고의 비극이 텍스트와 실재-역사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참으로 유사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1965년 학살과 식민지 콩고는 사라지고 그것을 재현한 영화와 소설만이 남는다. 작품은 '걸작'으로 기억되지만 그 시작점인 사건 자체는 지워진다. 즉 이 영화는 우리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태국 현대사의 비극을 찾아보게 되는 것(<엉클 분미>에 관해 정성일 선생이 했던 말로 기억함)과 정확히 반대의 효과를 낳는다. 분미 아저씨 또한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집행자였다는 점을 잊지 말자.
서구가 이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한국인들이 더군다나 영화인들이 그저 이 영화에 압도당한 채 걸작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광경이야말로 기괴할 따름이다. 우리 또한 인도네시아의 1965년 학살에 버금가는 살상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대체 누구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인가? <액트 오브 킬링>은 기껏해야 참으로 잘 만든 스너프 영화일 뿐이다.
*추가1: <액트 오브 킬링>에 관한 (배급사의 홍보자료를 포함한) 거의 모든 한국어 정보는 역사적 사실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 1965년 학살은 수하르토 정권 하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카르노와 수하르토의 정권 교체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학살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수카르노는 계속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폭력이 완전히 마무리된 1967년에야 수하르토 정권의 '신질서'는 시작되었다. 또한 이 학살은 홍보자료들이 말하는 대로 "비밀"리에 벌어진 일도 아니다. 사소할 수도 있는 이 잘못된 정보들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관객을 사건 그 자체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추가2: 또한 가해자에게 자신의 행위를 재연하고 또 재현할 (그럼으로서 그 순간의 쾌감을 다시 느끼고 또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있다. 예를 들어 피해자의 증언을 듣기 어렵다는 이유로, 나찌 전범에게 유태인 학살을 재연할 기회를 주거나, 전 일본군이 위안부 강간을 재연해 보이는 영화를 만든다면 윤리적 비난을 피할 수 있을까?
*추가3: <까이에 뒤 시네마>는 이 영화에 별 하나를 주고 "그 논리를 해체해야할 스펙타클하고 교활한 장치"라고 혹평했다. <리베라시옹>과 <크리티캣> 역시 "비열한 영화"라고 비판했다. 프랑스에서도 물론 극찬하는 이들이 있지만 적어도 평단에서는 찬반 논란이라도 있는 모양.
(영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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